조선상고사(300. 단재 신채호 저, 길원 남태욱 편역)

조선상고사(300)



 

앞의 전황은 신라가 그 맹약을 배신한 행위를 숨기기 위해 백제의 평양 격파를 본기에서 빼어 버렸고, 거칠부의 10고을 탈취를 누구와 싸운 결과임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百濟先攻破平壤(백제선공파평양---백제가 먼저 평양을 공격해 깨뜨렸다)"고 한 7자가 우연히 남아 있어서 이것이 거칠부전(居柒夫傳)에 게재되어 그 일을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청안(淸安)의 옛이름은 도살(道薩) 혹은 도서(道西)이니, 다 <돌시울>로 읽을 것이요, 진천(鎭川)의 옛 이름은 흑양(黑壤), 금양(金壤), 금현(金峴), 금물내(今勿內) 혹은 만노(萬弩)이니, 우리의 고어(古語)에 천(千)을 <지물>, 만(萬)을 <거물>이라 하였는데, 진천은 <거물내>이므로 흑양의 흑(黑)과 만노의 만(萬)은 다 <거물>의 뜻을 쓴 것이고, 금물(今勿), 금물(金勿)은 <거물>의 음을 쓰는 것이며, 양(壤), 내(內), 노(弩)는 다 <래>의 소리를 쓴 것이고, 금양(金壤), 금현(金峴)의 <금(金)>은 금물(金勿)을 줄인 것이고, <현(峴)>은 금물내(金勿內)의 산성(山聖)을 가리킨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금의 경기도는 물론이요, 충청도의 충주(忠州), 괴산(槐山) 등지까지도 고구려의 영토로 되어 있었으므로  근세에 정다산(丁茶山), 한진서(韓鎭書) 등 여러 선생이 다 "고구려가 지금의 한강 이남의 땅을 한 발자욱도 밟아 본 때가 없다"고 하여 사기의 잘못을 공격하였으나, 이 도살성의 점령으로 보건대 고구려가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는 말이 어찌 잠꼬대가 아니냐?

그러나 이는 고구려의 한때의 점령이고 오랜 동안은 황해도까지도 늘 백제의 땅이었으니, 충청북도 각 지를 고구려의 고을로 만든 삼국사기가 잘못 아님은 아니다.

 

"竹嶺以外,高峴以內 十郡(죽령이외, 고현이내 10군--죽령 밖 고현 안쪽의 10고을)"은 어디인가? 죽령은 지금의 죽령이요, 고현은 지금의 지평(砥平:양평군) 용문산(龍門山)의 명치(鳴峙)이고, 10고을은 지금의 제천(堤川), 원주(原州), 횡성(橫城), 홍천(洪川), 지평(砥平), 가평(加平), 춘천(春川), 낭천(狼천: 지금의 華川) 등지이니, 뒤에 신라 9주(州)의 하나인 우수주(牛首州)관내의 군현(郡縣)이 그것이다.   

by 홍익인간 길원 | 2012/01/27 09:15 | 호랑이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조선상고사(299. 단재 신채호 저, 길원 남태욱 편역)

조선상고사(299)

 

이듬해 기원 551년에 돌궐족(突厥族)이 지금의 몽고로부터 동침(東侵)해 와서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岩城)을 공격하므로, 양원왕이 군사를 나누어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돌궐을 격퇴하는 동안에 백제의 달솔(達率)부여달기(夫餘達己)가 정병 1만으로 평양을 급습하여 점령하니, 양원왕은 달아나 장안성(長安城)을 새로 쌓고 서울을 옮겼다.

 

장안성은 혹은 지금의 평양이라고도 하지마는, 만일 평양이라고 한다면, 이는 양원왕이 평양에서 평양으로 달아난 것이 되니 어떻게 말이 되는가?

장안성은 대개 지금의 봉황성(鳳凰城)이요, 당시의 신평양(新平壤)이니 "安東都護府南至平壤八百里[안동도호부남지평양팔백리--안동도호부{지금의 遼陽(요양)}에서 남쪽으로 평양까지 8백리]"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구려 본기 평원왕(平原王) 28년에 장안성으로 서울을 옮겼다고 하였으니, 양원왕이  한 때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곧 평양으로 환도하고, 뒤에 평원왕에 이르러 다시 장안성, 곧 신평양으로 서울을 옮긴 것이다.

 

신라가 만일 그 동맹의 의를 다하여 백제와 협력해서 고구려를 쳤더라면, 혹시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가까운 백제를 먼 고구려보다 더 미워하는 터였고, 또한 백제를 위해 고구려를 토멸하면 그 결과로 백제가 강성해져서 신라로서 대적하기 어려울 것을 아는 터이므로, 진흥왕이 가만히 백제의 뒤를 습격하여 그 새로 얻은 땅을 빼앗기로 작정하고, 병부령(兵部令)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지금의 충청도 동북으로 진군하게 하고, 한아손(大阿찬) 거칠부(居柒夫)로 하여금 구진(仇珍), 비태(比台), 탐지(耽知), 비서(非西), 노부(奴夫), 서력부(西力夫), 비차부(比次夫), 미진부(未珍夫) 등 팔로(八路)의 군사를 거느리고 죽령(竹嶺) 이북으로 진군하게 하니, 백제는 이를 동맹국의 출병(出兵)이라 하여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라끼리의 투쟁에 무슨 신의가 있으랴? 이사부가 백제와 협력하여 도살성(道薩城)을 탈환하고는 곧 백제의 군사를 갑자기 공격하여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키고, 거칠부는 군사를 나누어 죽령 밖의 백제의 각 군영(軍營)을 쳐 깨뜨려서 백제가 점령한 죽령 밖 고현(高峴) 이내의 10고을을 빼앗으니, 이에 백제는 닭 쫓던 개 하늘 쳐다보는 꼴이라 하기보다 독에 든 쥐요, 함정에 빠진 범의 꼴이 되었다. 그래서 10고을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쳐들어갔던 수만의 대병도 진퇴유곡(進退維谷)으로 패망하였다.   

by 홍익인간 길원 | 2012/01/27 05:50 | 호랑이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조선상고사(298. 단재 신채호 저, 길원 남태욱 편역)

조선상고사(298)

 

4. 신라의 10郡 탈취와 공수동맹의 결렬

 

기원 548년에 고구려의 양원왕(陽原王)이 예(濊)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한북(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니, 진흥왕이 백제와의 동맹에 따라 장군 주진(朱珍)을 보내 정병 2천으로 응원해서 고구려 군사를 격퇴하였다.

 

이때에 한강 이북은 안장왕의 연애전(戀愛戰)으로 인하여 모두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었는데, 이 한북(漢北)이란 어느곳인가?

이는 대개 지금 양성(陽城) 한래(--漢字로 번역하면 역시 漢江)의 북쪽을 가리킨 것이요, 독산성(獨山城)은 지금 수원(水原)과 진위(振威--평택군)사이의 독산(禿山) 고성(古城)인 듯 하다.

 

양원왕이 이 기별을 접하고 다시 대병을 내어 더욱 깊이 들어가서 이듬해에 지금의 충청도 동북쪽 일대로 들어왔다.

고구려는 도살성[道薩城--지금의 淸安(청안)]에 웅거하고 백제는 금현성[金峴城--지금의 鎭川(진천)]에 웅거하여 해포를 두고 혈전을 벌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신라는 백제의 동맹국이었지마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by 홍익인간 길원 | 2012/01/27 05:31 | 호랑이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1000조원 가계 부채 시대 '생계형 대출' 급증--시한 폭탄

[1000조원 가계 부채 시대] ‘생계형 대출’ 급증… 금융시장 시한폭탄

 
폭주하는 가계 부채 기관차

          한경비즈니스|
입력 2012.01.18 13:44


빚을 내 살림을 꾸려가는 가계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작년 9월 말 기준으로 한국 가계의 부채 총액(가계 신용 기준)은 892조4571억 원을 넘어섰다. 전국 2001만9850가구에 가구당 4458만 원씩 나눠줄 수 있는 엄청난 액수다. 아직 공식 통계가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해 가계 신용 잔액은 900조 원을 가뿐히 돌파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부채의 증가 속도다. 우상향으로 가파르게 치솟은 가계 부채 그래프는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9~2010년까지 11년 동안 가계 부채는 연평균 13% 증가해 같은 기간 명목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7.3%를 훨씬 넘어섰다. 주목할 것은 주택 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가계 부채 증가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소득층·비은행권이 증가세 주도

가계 부채의 적정성을 재는 대표적인 지표는 GDP 대비 가계 부채비율과
가처분소득대비 가계 부채비율이다. 한국은 가계 부채가 GDP의 85.9%(2009년)로 금융 위기 직격탄을 맞은 미국(100.2%)이나 영국(11.0%)보다 낮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CED) 평균(77.0%)과 일본(80.4%)보다 높은 수준이다.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이 수치가 152.9%로 미국(132.0%)마저 앞지르고 있다. 최원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 부채비율이 낮아지는 추세"라며 "반면 한국은 2009년 152.9%에서 2010년 155%로 계속 치솟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가계가 빚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대규모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으로 기업들의 대출 수요가 감소하자 금융회사들이 공격적으로 가계 대출 시장 개척에 뛰어든 결과였다. 1999~2002년 4년간 연평균 24.3%씩 가계 부채가 급증했다. 당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카드사들이다. 2000년 여신 전문 금융회사의 가계 대출(카드론·현금서비스)이 한 해 동안 무려 107.4%나 증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터진 카드 사태로 가계 부채는 일시적인 조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2005년 부동산 경기의 이상 과열과 함께 주택 담보대출이 바통을 넘겨받았다.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집값이 뛰자 시중 자금이 주택 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2006년 수도권 아파트 값이 한 해 동안 24.6% 뛰었고 같은 기간 은행 주택 담보대출도 14.1% 증가했다.

가계 부채 문제에 대한 정부의 인식은 '다소 걱정스러운 수준이지만 가계 부채발 금융 위기 가능성은 낮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낙관론은 상당 부분 집값 하락에 대비해 일찌감치 담보인정비율(LTV)을 규제하는 안전장치를 해놓았다는 데 의존한다. 실제로 한국의 LTV는 47% (2009년 말)로 미국(75%) 등 다른 선진국보다 훨씬 낮다. 집값이 반 토막 나도 은행들은 담보로 잡은 주택을 처분해 충분히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가계 대출 부실이 금융회사 부실로 전이될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시스템 리스크의 가능성이 낮은 건 분명하지만 가계 부실, 가계 파탄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고 말했다.

최근 가계 부채의 질과 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지난해 10월
한국은행이 낸 '금융 안정 보고서'는 최근 주택 구입 목적보다 생활형 자금 성격의 가계 대출이 가계 부채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택 담보대출 중 주택 구입 이외의 목적 대출 비중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꾸준히 상승해 작년 상반기 48.4%로 올라섰다. 같은 기간 신용 대출과 신용카드 대출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처럼 '생계형 대출'이 늘어난 것은 가계의 주머니 사정이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소득 감소와 물가 상승이 겹친 결과"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까지 실질임금 증가율은 마이너스 3.49%로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8년(-9.3%),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졌던 2008년(-8.5%)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치다.

생계형 대출의 주 수요층은 벼랑 끝에 내몰린 저소득층이다. 연소득 2000만 원 미만인 저소득 계층이 가계 대출 창구를 두드리고 있다. 현재 저소득 계층의 대출 잔액은 전체 가계 대출의 12%에 불과하지만 2010~2011년 상반기까지 대출 증가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달했다. 이들은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대출금리도 고소득 계층보다 높아 부실화 가능성이 크다.

비은행권이 가계 부채 증가를 주도하는 것도 새로운 변화다. 2010~2011년 상반기까지 비은행 금융회사의 가계 대출 증가율(17.95)은 은행(8.5%)을 두 배 이상 앞질렀다.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상호금융의 약진이다. 한국은행은 지방 주택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면서 지방 소재 상호금융사들이 주택 담보대출에 강한
드라이브를 건 때문으로 분석했다.

전체적으로 가계 부채의 중심축이 상환 능력이 탄탄한 중상위 소득 계층(3~5분위)에서 저소득 계층으로, 금리가 낮은 은행에서 금리가 높은 비은행권으로, 자산 증가를 동반하는 주택 구입에서 생계형 대출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가계 부채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과 같은 증가세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출을 무리하게 죌 경우 부작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계 부채의 딜레마다.

장승규 기자 skjang@hankyung.com

by 홍익인간 길원 | 2012/01/18 16:09 | | 트랙백 | 덧글(0)

조선상고사(297.단재 신채호 저, 길원 남태욱 편역)

조선상고사(297)

 

           거칠부의 할아버지 내숙(乃宿)은 쇠뿔한[--신라 재상(宰相)의 일컬음]이고, 아버지 물력(勿力)은 아찬(阿찬)이었으니, 왕 족으로서 대대로 장상(將相)집안이었다.


거칠부는 젊을 때 큰 뜻을 품고 고구려를 정찰하려고 머리를 깎고 중이되어 고구려에 들어가서 각지를 정탐하고 법사(法師) 혜량(惠亮)의 강당(講堂)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혜량은 눈치빠른 중이었으므로 이사부를 달리보고 沙彌(사미---새로 중이 된 사람)는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이사부가 "저는 신라 사람으로서 법사의 이름을 듣고 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고 하니, 혜량은 "노승이 불민하지마는 또한 그대를 알아보오. 고구려 국내에 어찌 그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겠소. 빨리 돌아가오"하고, 후일에 거칠부의 소개로 신라에 투항하기를 희망하였다.

거칠부는 돌아와 한아찬[대아찬--대관의 이름]이 되어 이사부와 함께 국정에 참여하여, 먼저 백제와 동맹해서 고구려를 깨뜨리고, 또 시기를 보아 백제를 습격하여 국토를 늘리기를 꾀하였다.


이때 백제의 성왕(聖王)이 한강(漢江)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신라와 동맹하려고 하였는데, 신라가 동맹하였던 여섯 가라(加羅)를 합쳐 버렸으므로 성왕은 신라와 동맹하는 것이 달갑지 아니하였지마는, 당시에 가라가 이미 망하여 동맹할 만한 제삼국이 없으므로 사신을 신라에 보내니, 이사부가 흔연히 이를 승낙하여 신라, 백제의 대 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성립되었다.     

by 홍익인간 길원 | 2012/01/13 19:36 | 호랑이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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